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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제1편] 제중원은 과연 누가 설립했는가?

조회수 : 18014 작성일 : 2017-08-18

최근에 어느 일간신문은 제중원 관련 기사에서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제중원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다. 서울특별시에서 헌법재판소 관내에 세운 제중원 터 표석이나 몇몇 백과사전의 제중원 관련 내용도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역사의 왜곡이다. 알렌이 갑신정변 당시 빈사상태에 빠졌던 조선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의 목숨을 구하고 고종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제중원 설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제중원의 고용의사였다.

제중원, 고종, 통리교섭통상사아문 관원들
제중원, 고종,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관리들 모습


고종, 조선 근대화를 꿈꾸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그 실천에 나섰다. 그들이 내세운 정치철학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었다. 정치체제, 사회질서, 사상, 문화, 종교 등 인간 사회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학은 우리의 전통을 고수하되 무기나 산업, 과학 기술 등 실용적인 분야는 서양의 근대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꾀하는 것만이 나라와 백성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에 시찰단을 보내 그들의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고, 안으로는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박문국 등 근대 기관을 설치했다.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외교 통상조약을 맺고, 김옥균을 활용해 일본과 교류하면서 전 방위적으로 근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대원군 측이 시도한 정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근대화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분야의 근대화에도 주목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의료를 탐색했다. 이듬해에는 전통의학에 기초한 국립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폐지하여 국가 의료정책의 전환을 모색했다. 1884년 정부 기관지 《한성순보》를 통해 백성들에게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는 이를 허락했다. 조선에서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제중원, 조선 백성에게 첫 선을 보이다
  1885년 4월 3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는 서울의 4대문과 종각에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을 붙이고, 한성부로 하여금 동네마다 이 내용을 알리도록 했다. “본아문(本衙門)에서 시의원(施醫院) 한 곳을 재동(齋洞) 본아문(本衙門) 북쪽 두 번째 집에 설치하고 미국 의사 안련(安蓮, 알렌)을 초빙했으며, 더불어 학도(學徒)와 의약(醫藥) 및 여러 도구를 갖추었다. 오늘부터 매일 미시(未時, 오후 1~3시)부터 신시(申時, 오후 3~5시)까지 병원을 열고 약을 제공할 것이다. 이 의사는 학술이 뛰어난데, 특히 외과에 장점이 있어 한 번 진찰을 받으면 신묘한 효과를 본다. 현재 본원에는 남녀가 기거할 방이 있으니, 무릇 질병이 있는 자는 와서 치료를 받도록 하라. 약값은 나라에서 지급할 것이다.”

   이 방문은 조선 정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국립병원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공식 안내문이었다. 

제중원, 홍영식의 집에서 문을 열다
  이 국립병원의 당초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으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보름 만에 이를 무효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 명명했다. 충북 음성군과 진천군 경계지역에 광혜원(한자도 똑같음)이라는 지명이 있어서 혼동을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제중’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역적이 되어버린 홍영식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했고, 재정 형편이 좋지 않았음에도 제중원 운영비를 1년에 3천 원씩 집행했다. 

제중원 사람들
  고종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督辦, 지금의 장관)이나 협판(協辦, 지금의 차관)에게 병원장 격인 제중원 당상(堂上)을 겸임시켰다. 그래서 ‘온건개화파’의 대표적 인사인 김윤식을 시작으로 민종묵, 남정철 등 외무관료들이 제중원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외국어에 능숙하고 서양 정세에 밝은 젊은 관리들은 제중원 주사(主事)로 발령을 냈다. 특히 제중원 초창기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 영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우수한 학생들이 배치되었는데, 고종과 조선 정부가 제중원에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제중원에서 일했던 주사들의 상당수는 후에 서양 근대 문물의 수용과 연관된 기관, 즉 육영공원, 전환국, 전보사 등으로 인사이동 되었다. 그들이 1880~1890년대 조선 정부가 펼친 근대화 정책의 첨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직 양의(洋醫)가 없었다. 그래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알렌을 고용해 환자 진료를 맡겼다.

   그 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헤론(John W. Heron), 하디(Robert A. Hardie), 빈튼(Cadwallader C. Vinton), 에비슨(Oliver R. Avison) 등이 차례로 제중원의 고용의사로 일했다. 

홍영식
홍영식 선생 모습

제중원 설립자는 고종과 조선 정부!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제중원은 분명히 국립병원이었다. 선교사들도 이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중원을 가리켜 ‘왕립 병원(The Royal Hospital)’, ‘정부 병원(The Government Hospital)’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알렌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제출한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에서 ‘조선정부 병원(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이라고 지칭했다. 결국 제중원 설립자는 고종과 조선 정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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