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한 장에 담긴 불안과 불편
서울대학교병원에는 매일 약 1만 명의 환자가 외래 진료실을 찾습니다. 처음 방문하는 환자 중 상당수는 소견서와 검사 결과, 영상 자료가 담긴 CD나 USB를 직접 챙겨 옵니다. 몇 년 치 진료 기록을 한꺼번에 가져오기도 하고 자료를 빠뜨렸다며 미안하다는 분도 있습니다. 환자에게 이 서류 봉투는 질병과 싸워온 기록이며, 의료진에게는 이전 치료 과정을 파악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정부에서는 다양한 사업을 통해 의료기관 간 진료정보교류 시스템을 마련 중에 있지만 참여 기관과 전송 항목이 제한적이고 시스템 구축에 드는 비용으로 인한 표준화 문제, 서버, 네트워킹 등 기술적 문제로 실제 현장에서 체감되는 연결은 아직 촘촘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많은 환자가 여전히 진료 기록과 영상 자료를 직접 들고 병원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보가 단절되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서류와 자료가 한 병원에서 발급되어 다른 병원에 전달될 때까지 환자는 이를 직접 보관하고 제출해야 합니다. 그 사이 진료 정보의 흐름이 끊기기 때문에 환자를 받을 의료진도 자료를 미리 확인하거나 필요한 준비를 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정보 단절이 가져오는 손실은 생각보다 큽니다.
첫째는 반복 검사입니다. 외부 영상이 해당 병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지 않으면 혈액검사나 CT·MRI 촬영을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이는 환자에게 비용 부담뿐 아니라 불필요한 방사선 노출을 더하고 사회 전체로는 중복 검사에 따른 의료비 지출로 이어집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응급 상황에서 시간은 곧 예후입니다. 뇌졸중, 심근경색, 대동맥박리처럼 분 단위로 치료 결과가 달라지는 질환에서는 전화로 병상을 알아보고 팩스로 소견서를 주고받는 동안 지체되는 시간이 고스란히 환자의 손실이 됩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입니다. 진료 정보가 요약되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거나 중요한 내용이 빠질 수 있습니다. 일부 맥락이 누락된 채 진료를 시작하는 것은 아무리 숙련된 의료진이라도 충분한 정보 없이 판단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환자는 진료실에서 자신의 병력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고 ‘내 기록을 제대로 확인해줄까’ 하는 불안도 느끼게 됩니다.
AI는 EMR과 PACS를 어떻게 잇는가
이번 사업의 핵심은 병원 밖에 별도의 시스템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 병원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전자의무기록(Electronic Medical Record, EMR)과 의료영상저장전송시스템(Picture Archiving and Communication System, PACS)에 AI를 직접 연동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EMR 보급률은 96.5~100%, PACS 보급률은 90% 이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상급종합병원과 대학병원 대부분은 이미 종이와 필름을 사용하지 않는 디지털 병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EMR에는 진료 기록과 처방, 검사 결과가 쌓이고 PACS에는 의료영상이 저장됩니다. 문제는 병원마다 따로 보관된 정보를 필요한 순간에 어떻게 정리하고 전달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 다양한 AI 기술이 활용됩니다.
첫째는 음성 기록입니다. 진료 중 의료진이 말한 내용을 AI가 실시간으로 받아 적어 진료 기록이나 전원의뢰서의 초안을 작성합니다. 이를 통해 의료진은 키보드 입력에 매달리기보다 환자의 얼굴을 보며 진료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요약입니다. AI는 흩어진 기록에서 주요 진단과 치료 경과, 투약력, 알레르기, 최근 검사 결과 등 환자 전원에 필요한 정보를 골라 전원의뢰서 초안으로 정리합니다.
셋째는 광학문자인식(Optical Character Recogni tion, OCR)입니다. 환자는 타 병원의 종이 기록을 병원 방문 전에 안내받은 링크를 통해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해 전송할 수 있습니다. 업로드된 기록은 시각언어모델(Vision Language Model, VLM)과 OCR 기술을 거쳐 텍스트로 변환되고, AI가 이를 다시 요약해 검색 가능한 정보로 정리합니다.
넷째는 영상 판독입니다. PACS에 저장된 영상에 판독문이 없는 경우에는 AI가 영상을 분석해 판독을 보조하고 응급도를 분류합니다. 이를 통해 환자를 받는 병원은 필요한 영상과 정보를 미리 확인할 수 있습니다.이 체계는 환자를 상급종합병원으로 보내는 의뢰 과정뿐 아니라 치료를 마친 환자가 지역 병의원으로 돌아가는 회송 과정까지 함께 지원합니다. 상급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환자가 지역 병의원으로 회송될 때 AI가 입원 경과와 수술·시술 내용, 앞으로의 관리 계획을 정리해 회송 소견서 초안을 만듭니다. 나아가 마취 전 환자 상태 평가지와 퇴원기록지 작성 등 병원 안에서 반복되는 문서 업무에도 같은 기술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병원에 들어와 치료받고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응급실의 30분이 달라진다
지난 5월 29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이 체계의 시연이 있었습니다. 6월 1일에는 외신 기자를 대상으로관련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시연은 지역 병원에서 진료받던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상급종합병원으로 긴급 전원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해 진행했습니다. 기존 방식이라면 담당 의료진이 환자 곁을 떠나 환자를 받아줄 병원을 찾고, 소견서를 작성하고,영상 CD를 준비한 뒤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합니다. 여러 절차가 차례로 이어지는 동안 귀중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새 체계에서는 의료진이 환자 상태를 구술하면 AI가 이를 기록하고, EMR과 PACS에서 필요한 정보를 모아 전원의뢰서 초안을 만듭니다. 의료진은 초안을 확인하고 수정한 뒤 곧바로 전송할 수 있습니다.
환자를 받는 병원에는 환자가 도착하기 전부터 정리된 진료 요약과 영상 자료가 전달됩니다. 응급의학과와 해당 진료과는 미리 협의해 필요한 검사와 시술을 준비하고, 병상이나 수술실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뒤 처음부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환자의 상태를 알고 준비한 상태에서 치료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앞당긴 30분은 단순한 시간 절약이 아닙니다. 어떤 환자에게는 후유증의 정도를 줄이고, 어떤 환자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AI는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AI가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초안’입니다. 환자를 전원할지, 어느 병원과 진료과로 보낼지, 어떤 치료를 먼저 시행할지는 의료진이 판단합니다. 최종 문서를 확인하고 책임지는 주체 역시 사람입니다. AI가 맡는 일은 판단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빼앗고 의료진을 지치게 했던 기록과 정리 업무입니다.
지역·필수·공공의료 현장에서 AI의 도입은 의료진에게 시간을 돌려주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진료 기록과 서류 작성에 쓰는 시간이 줄어들면 환자를 더 오래 살피고, 중요한 결정을 충분히 검토할 여유가 생깁니다. 표준화된 형태로 정리된 정보는 병원과 진료과가 달라도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해 협진의 정확도와 속도를 높입니다.
환자에게는 자신의 병력을 처음부터 반복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진료 기록과 영상이 환자보다 먼저 전달되고 의료진이 이를 미리 검토한다면 낯선 병원으로 옮겨가는 불안도 한결 줄어듭니다. 환자는 서류와 CD를 챙기는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치료에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앞당긴 30분은 어떤 환자에게는 후유증의 정도를 줄이고,
어떤 환자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신뢰 위에 쌓는 기술
진료 정보는 가장 민감한 개인정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정보를 원활하게 연결하는 것만큼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 체계는 환자의 동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며 정보가 전송되는 구간은 암호화됩니다. 누가 언제 어떤 정보를 열람했는지도 기록으로 남습니다. AI가 작성한 요약이 원본과 일치하는지, 진료에 필요한 내용을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서울대학교병원 헬스케어AI연구원이 기술의 성능뿐 아니라 안전성과 신뢰성 검증에 무게를 두는 이유입니다.
이 사업은 서울·경기, 강원, 전남 세 권역에서 먼저시작합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서울의료원, 성남시의료원 등과 참여하고, 강원 권역에서는 강원대학교병원과 영월·강릉의료원, 평창보건의료원이 함께합니다. 전남 권역에서는 전남대학교병원과 광주기독병원이 참여합니다. 도시와 지역, 상급종합병원과 공공의료기관을 연결해 의료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도 이 체계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확인할 예정입니다.
환자 한 사람을 중심에 두는 의료로
지역 병의원에서 일차 진료를 받고 필요할 때 상급종합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은 뒤 다시 가까운 병원으로 돌아가 관리 받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의료전달체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AI 기반 의뢰·회송 체계는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편과 비효율을 없애는 일입니다. 본 기술의 성공 여부는 성능 지표가 아니라 사람의 경험으로 판가름 날 것입니다. 환자가 병원을 옮기는 과정에서 불안을 덜고, 의료진이 필요한 정보를 미리 확인한 상태에서 진료를 시작할 수 있다면 기술은 제 몫을 다한 것입니다.
시설, 인력, 거리 등의 이유로 환자는 병원과 병원 사이에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료는 끊김 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 당연한 명제를 현실로 만드는 일을 서울대학교병원 헬스케어AI연구원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형철 서울대학교병원 헬스케어AI연구원장(마취통증의학과 교수)
데이터 사이언스와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미래 의료의 디지털 전환을 선도해왔다. 서울대학교병원 데이터사이언스연구부장을 거쳐 현재 헬스케어AI연구원장으로서 한국형 의료 특화 초거대 언어모델(LLM)인 ‘KMed.AI’와 통합 AI 플랫폼 ‘SNUH.AI’의 개발 및 임상 응용을 총괄하고 있다. 네이버와의 전략적 협업을 통해 의료 현장의 맥락을 깊이 이해하는 ‘소버린 AI(Sovereign AI)’ 구축에 주력해왔으며, 2025년 의사 국가고시(KMLE) 평가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며 KMed.AI의 독보적인 성능을 입증했다. 현재 인공지능이 의료진의 판단을 정교하게 보조하고 환자에게 진료의 온기를 되돌려주는 ‘공기처럼 스며드는 AI’ 환경 조성과 글로벌 의료 AI 생태계 구축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