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물건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전합니다.
Surgical light
세상의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한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도, 빌딩 속 방 안의 전등 아래에서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뒤편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진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그런데 그 이치를 거스르는 빛이 하나 있다. 수술실 안에 환자가 누워 있는 수술대 위를 비추는 등, 무영등이다.
무영등(無影燈). 말 그대로 ‘그림자가 없는 등’이라는 뜻이다. 수술실 무영등은 여러 개의 광원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비춰서 무언가에 빛이 가려져도 다른 방향의 빛이 그 부분을 메워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한다. 그래서 수술하는 의사의 머리가, 손이, 기구가 한쪽 빛을 가로막아도, 다른 방향에서 오는 빛이 그곳의 그림자를 곧바로 메운다. 어느 한 곳이 어두워지려는 순간, 다른 빛들이 달려와 그늘을 지운다. 그렇게 여러 빛이 모이고 또 모여, 그림자를 지운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수술대 위에 한 조각의 그림자도 용납할 수 없다. 수술대 위에 그늘이 진다는 것은 그 어둠 속에 무언가가 가리워져 있다는 뜻이다. 미처 보지 못한 작은 출혈,채 걷어내지 못한 병의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위험. 그림자 한 조각이 병을 가리면 그 병은 어둠에 기대어 살아남는다. 그래서 무영등이 사방에서 빛을 모아 그늘을 지우듯 의사는 병이 숨을 만한 어떤 어둠도 남기지 않으려 집요하게 그림자를 거두어 간다. 그림자를 허용하지 않는 서늘하게 새하얀 불빛 속에서만 의사는 비로소 수술을 무사히 끝맺을 수 있다.
그런데 병원 생활이 쌓일수록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 밝은 빛 아래에서 의사가 보는 것은 병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빛이 내려앉은 그 자리에는 한 사람의 몸이, 그리고 그 몸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이 함께 놓여 있다. 지금 수술대 위에 홀로 누워 있는 그 몸은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며, 아침마다 문을 나서는 이를 배웅하고 저녁마다 돌아올 이를 기다리던 사람이다. 무영등이 비추는 것은 병변 하나이지만, 그 빛이 정작 지키려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 전부다. 그 사실이 수술장에 선 모든 의료진의 마음에 사명감과 책임감을 새겨 넣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빛과 그림자 사이를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의 삶에도 그늘 없이 맑은 날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 그늘이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병원의 문을 두드린다. 질병이라는 것은 참으로 얄궂어서 몸속의 아주 작은 곳에 자리를 잡는 순간 한 인간의 일상 전체를 어둡게 물들인다. 주말에 가기로 했던 가족 여행, 저녁 식탁에서 나누던 사소한 농담, 내년을 기약하던 계획들이 그 한 조각의 그늘 아래 묻혀 일시에 흐릿해진다. 환자 본인뿐만 아니라 복도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보호자의 시간 역시 그 어둠 속에 함께 갇혀 멈춘다.
건강이란, 우리가 그 빛 속에 있을 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평범한 오후가 실은 얼마나 환한 빛으로 채워져 있었는지, 사람은 그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아무렇지 않게 내딛던 걸음, 무심히 삼키던 밥 한 술, 별일 없다는 짧은 안부 전화. 그 모든 사소한 일상이 실은 눈부신 빛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 짙은 그림자가 걷히는 순간은 의외로 요란하지 않다. 대단한 기적이 아니라 “수술 잘 끝났습니다”라는 의사의 한마디,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족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순간, 굳어 있던 어깨가 스르르 내려가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는 가족들의 안도 같은 것들이다. 그 사소하고 평범한 찰나마다 멈춰 있던 일상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잃어버렸던 내일의 계획이 제 빛을 찾는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그것은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소식이 아니라 꺼져 있던 삶의 불빛이 다시 켜지는 경험이다.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은 결국 다시 평범해지는 일이다. 그 평범함이 얼마나 눈부신 것이었는지를 이제는 아는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치유의 본질은 무영등이 작동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어느 한 군데 어둠이 고개를 들려 할 때 사방에서 다른 빛들이 교차하며 그 자리를 채운다. 질병의 흔적을 추적하는 의사의 집요함, 밤새 바이탈을 체크하는 간호사의 조용한 분주함, 문밖에서 내색하지 않고 마음을 보태는 가족의 염원,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일어나려는 환자 자신의 의지까지. 이 촘촘하게 얽힌 불빛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사방으로부터 밀려들 때 삶을 짓누르던 거대한 그늘은 서서히 뒤로 밀려난다. 그림자가 완전히 걷힌 자리에서 사람은 비로소 빛이 드리운 일상의 삶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최은경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외과 교수
최은경 교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외과와 대장항문외과 수련 과정을 거쳤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교수로 재직하며 진료와 연구, 디지털 헬스케어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의료 현장의 일상과 의사로서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 <INFJ 의사의 병원 일기>도 펴냈다. 현재 강남센터 미래건강사업단장을 맡아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미래 헬스케어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