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정희

사진. 박순재(Studio Cube)

장소. 학림다방(hakrimcoffee.kr)

5년을 바라보고 선택한 이식

이른 아침, 서울대학교병원 옆 학림다방에서 양점숙 님을 만났다. 그의 오랜 투병 생활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를 낳은 뒤 몸 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의식이 흐려질 만큼 위중한 상태가 이어졌다. 원인을 찾지 못해 여러 검사와 치료를 받다가 뒤늦게 신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서울대학교병원을 찾아 투석 치료를 시작했다.
“투석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뼈가 갈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어요.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해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것만 같아서 일부러 이불을 뒤집어쓴 채 꾹 참고 엎드려 있곤 했습니다.”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투석을 이어가기 힘들었던 양점숙 님은 병원에서 신장이식이라는 또 다른 치료 방법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당시에는 신장이식이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고 수술 결과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이식을 해도 기껏해야 5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했어요. 일단 5년을 버티면 그 안에 더 좋은 치료법이 나오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죠.”
이식을 결심했지만 누구에게 신장을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가족들이 모두 검사를 받은 끝에 당시 스물한 살이던 여동생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다.
“정말 받아도 되는지 계속 고민했어요. 내가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린 아들을 두고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신장을 내어준 동생에게는 지금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입니다.” 그렇게 양점숙 님은 국내 장기이식 분야를 개척한 고(故) 김수태 교수의 집도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이식 받은 신장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양점숙 님과 함께하고 있다.

“이식 후에도 계속 환자로만 누워 있다면
신장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시 얻은 삶을 스스로 채워가다

수술 당시 양점숙 님의 몸무게는 38kg에 불과했다. 고개를 들면 앞으로 쓰러질 만큼 기력이 없었지만 이식 후 스스로 먹고 걸을 수 있게 되자 평범한 일상이 새롭게 느껴졌다.
“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몸이 조금 나아지니까 하루에 시장을 두 번씩 다녔어요.”
건강 때문에 일반적인 직장생활은 어렵다고 생각한 그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시조를 만났다.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조를 공부해 등단했고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친 뒤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시조집도 펴냈다.
“ 이식 후에도 계속 환자로만 누워 있다면 신장을 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다시 살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시조는 양점숙 님이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남아 있던 아픈 기억과 불안을 글로 풀어냈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조를 가르치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도록 돕고 있다.
“ 환자 역시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면 마음까지 지치게 되잖아요. 조금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의료진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양점숙 님에게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몸의 변화를 살피고 불안한 마음을 글로 풀어내며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이어가는 것이다. 5년을 바라보고 시작했던 이식 후의 삶은 어느덧 45년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은 삶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