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정희

사진. 박순재(Studio Cube)

“저에게 직업을 물어본다면 첫 번째는 식물학자예요. 식물을 연구하다 보니 그림이 필요해서 그리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두 가지 일을 함께하게 되었어요.”
신혜우 박사는 대학에 들어가 식물분류학 연구실을 찾은 뒤 20년 넘게 식물을 연구해왔다. 식물세밀화를 시작한 곳도 연구실이었다. 패션디자인을 복수전공하던 그에게 지도교수가 식물 연구에도 그림이 필요하다며 식물 그리기를 권한 것이다.
식물학을 위한 도해에는 꽃과 잎뿐만 아니라 뿌리, 열매, 씨앗과 미세한 구조까지 담긴다. 같은 종이라도 자라는 환경과 개체에 따라 생김새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표본을 살피고 논문과 자료를 확인한 뒤 그 종을 대표하는 모습을 한 장에 정리한다.
“사람도 모두 같은 종이지만 키와 얼굴이 다르잖아요.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그림 한 장에 그 종의 특징을 담으려면 어떤 모습이 가장 대표적인지 오래 고민해야 해요.”

여섯 살에 정한 꿈

신혜우 박사는 경남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집을 나서면 늘 식물이 있었고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는 혼자 논두렁을 돌아다니며 풀과 꽃을 살펴보는 것이 일상이었다. 모르는 식물은 어머니에게 물었고 어머니도 알지 못하면 도감을 펼쳐 직접 이름을 찾았다.
“ 여섯 살 때 부모님이 사준 어린이 식물도감은 늘 곁에 두고 보는 책이었어요. 스스로 이름을 알아낸 첫 식물은 ‘봄맞이꽃’이었죠. 당시 도감 뒤편에 실린 저자 사진을 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머니에게 묻자 ‘식물학자’라고 알려주셨어요. 그때부터 꿈을 식물학자로 정했던 것 같아요.”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미술대회에 자주 나갔고 주변에서는 화가가 될 것이라고 했다. 미술을 전공할지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 알고 싶었던 것은 식물이었다. 결국 생물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식물 연구를 시작했다.
“ 시골에 살아도 식물을 좋아하는 친구는 별로 없었어요. 농작물에는 관심이 있어도 들판의 풀이나 잡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식물 이야기는 주로 어머니와 나눴어요.” 훗날 그가 ‘식물 상담소’를 열었을 때 예상보다 많은 어린이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식물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어 외롭다는 아이들이었다. 신혜우 박사는 그 아이들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았다.

“몸이 나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은 도움될 수 있어요.
어린 저에게 살구를 먹는 날을 기다리는
일이 그랬고, 이후에는 좋아하는 식물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삶을
이어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살구가 익으면 퇴원할 수 있을까

신혜우 박사는 선천성 심장병을 안고 태어났다. 수술이 필요했지만 당시 가정 형편으로는 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열한 살 무렵 지역 학교를 찾아다니며 치료가 필요한 심장병 어린이를 찾던 의료진에게 발견되었고, 가수 듀오 수와진의 심장병 어린이 돕기 활동을 통해 수술비를 지원받았다.
당시 그가 받은 수술은 가슴을 열어야 하는 큰 수술이었다. 중환자실을 거쳐 한 달 넘게 병원에 머물며 어린 나이에 죽음과 아픔을 가까이서 보았다.
“ 그때 알았어요. 부모님도 제 고통을 대신 겪어줄 수는 없다는 것을요. 아픈 시간은 결국 혼자 견뎌내야 하더라고요.”
병원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살구 과수원이었다. 그가 입원했을 때에도 주변에는 몇 그루의 살구나무가 남아 있었고 가지에는 초록색 열매가 맺혀 있었다. 조금씩 움직일 수 있게 된 뒤에는 살구가 얼마나 자랐는지 보러 갔다.
“ 살구가 익으면 나도 퇴원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어른들이 제 병이 어떤 상태인지, 언제 집에 갈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살구가 변하는 모습을 계속 바라봤던 것 같아요.” 당시 의료진은 수술을 받지 않으면 서른 살까지 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 말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후회 없이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식물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렸다. 식물세밀화로 상을 받은 것도 스물아홉 살 때였다.
“ 식물이 질리면 언제든 그만두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질리지 않았나 봐요. 여전히 연구하는 걸 보면… (웃음)”

식물을 사람처럼 보지 않는 일

사람들은 식물학자에게 식물에게서 어떤 삶의 지혜를 배웠는지 자주 묻는다. 신혜우 박사는 그런 질문에 선뜻 답하지 않는다. 지구에는 수많은 식물 종이 있고 살아가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수천 년을 사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몇 달 안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뒤 생을 마치는 풀도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인간과 비교하거나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존재로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 식물은 제 연구 대상이에요. 식물학자가 하는 일은 식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생각을 덧붙이기보다 식물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죠.”
식물에게 사람의 감정을 옮겨 놓는 것도 경계한다. 식물은 인간처럼 뇌와 중추신경계를 지니지 않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환경에 반응하고 살아간다. 식물이 사람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식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뜻이다.몇 년 전에는 평생 자신의 정원을 갖고 싶어 했던 어머니를 위해 가족과 함께 충남 부여에 집을 마련했다. 정원을 가꾸고 농사도 짓기 시작했지만 식물학자인 그에게도 농사는 쉽지 않았다. 사과와 복숭아는 벌레가 먹고 옥수수는 고라니에게 내주기도 했다. “정성을 많이 들인다고 무조건 잘 자라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햇빛과 흙이 필요한지, 원래 어떤 곳에서 사는 식물인지를 알아야 하죠.” 신혜우 박사는 식물을 돌보는 일은 자신의 방식대로 무엇인가를 많이 해주는 것보다 그 식물에 맞는 환경을 살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때로는 물을 더 주는 것보다 가만히 기다리는 일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나의 식물을 오래 본다는 것

건강을 회복하고 있거나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식물이 있느냐는 질문에 신혜우 박사는 특정한 식물을 꼽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 하나를 정해 오래 관찰해 보라고 했다.
“사람들은 보통 꽃이 활짝 피었을 때나 열매가 익었을 때를 기억 하잖아요. 어떤 식물이든 꽃이 피고 지는 모습, 열매가 맺혀 익고 씨앗이 퍼지는 과정까지 계속 지켜보면 좋겠어요.”
몸이 아플 때는 생각이 자신의 몸과 감정에만 머물기 쉽다. 그럴 때 다른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잠시 시선을 돌리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힘들 때 아픈 부분만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럴 때 다른 생물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거든요. 제가 어릴 때 살구나무를 봤던 것처럼요.” 식물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직접 위로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작은 변화를 발견하고 다음 모습을 궁금해하는 일이 하루를 견디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혜우 박사는 아픈 사람의 마음을 쉽게 안다고 말하거나 아픔에 반드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도 조심스럽다.
“ 아픈 사람에게 ‘내가 너를 이해한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겪는 시간은 다르니까요. 대신 몸이 나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어린 저에게는 익은 살구를 먹는 날을 기다리는 일이 그랬고, 이후에는 좋아하는 식물을 연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삶을 이어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식물을 오래 본다는 것은 꽃이 핀 순간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는 날에도 상태를 살피고 다음 모습을 기다리는 것이다. 몸을 회복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오늘의 상태를 살피며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나아질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