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으로 우주를 탐험하는 인간, 그 모험의 현장에서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의 65 Landsdowne Street. 제가 매일 아침 발걸음을 옮기는 하버드 의과대학 Brigham and Women’s Hospital 감염내과 Jonathan Li 실험실 건물 현관에는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 감으로 우주를 탐험하는 인간은그 모험을 과학이라 부른다.”
그 아래에는 이곳에서 일생을 헌신한 과학자들을 향한 존경의 헌사가 나란히 적혀 있습니다. 현관 앞에서 출퇴근 셔틀을 기다리다 문득 이 문구들을 마주할 때면 저 또한 인류의 오랜 숙제인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uman Immunodeficiency Virus, 이하 HIV) 정복을 위한 거대한 모험의 한 줄기에 동참하고 있다는사실에 가슴 벅찬 책임감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우리 몸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는 이 까다로운 바이러스를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한 여정은 우주를 탐험하는 일만큼이나 치열하고 숭고한 과정임을 매 순간 실감하곤 합니다.
65 Landsdowne Street 현관에 새겨진 허블의 명언
전 세계 희망이 모이는 HIV 연구의 심장부
Jonathan Li 실험실은 HIV 완치 연구의 핵심이자 전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에이즈 임상시험 그룹(ACTG, AIDS Clinical Trials Group) 코호트 연구의 중심지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지속 바이러스혈증(Nonsuppressible Viremia)’ 파트에 참여하여 바이러스 저장소(Viral Reservoir)를 분석하고 자가중화항체능을 평가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연구실의 냉동고를 열 때마다 저는 매번 압도적인 연구 인프라의 힘을 실감합니다. 근처 뉴잉글랜드(New England) 지역은 물론이고 멀리 앨러배마(Alabama)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심지어 대서양 너머 유럽에서 액체 질소 탱크에 실려 온 수많은 샘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거리와 국경을 초월해 모인 이 귀한 시료들은 분석 대상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환자들의 희망이 담긴 샘플들이 ‘HIV 정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모이는 과정에서 협업(Collaboration)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버드 의과대학 Brigham and Women’s Hospital 안내판
수평적 소통과 열린 문화가 만드는 혁신의 동력
HIV 완치 연구의 최전선에서 이룬 학문적 성취만큼이나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이곳만의 독특한 연구 문화였습니다. 지도교수인 Jonathan Li는 매주 자신의 모든 일정을 구성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합니다. 덕분에 연구원들은 직급에 상관없이 각자 필요한 시간에 개인 혹은 그룹 미팅을 자유롭게 신청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어갑니다.
특히 매주 열리는 랩 미팅은 이곳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시간입니다. 랩 테크니션(Lab Technician)부터 학위 과정 학생, 리서치 사이언티스트(Research Scientist)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이 직위와 상관없이 치열하고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수평적이고 열린 소통 방식이 탄탄한 인프라와 결합할 때 비로소 세계적인 연구 성과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랩 미팅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새로운 시야로 그리는 서울대학교병원의 미래
이번 연수는 저 개인의 학술적 성장을 넘어 새로운 환경에서의 환기를 통해 연구자로서 초심을 되찾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보스턴에서 직접 경험한 선진적인 연구 시스템과 유연한 문화를 우리 감염내과, 나아가 서울대학교병원의 발전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지 기분 좋은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곳 보스턴에서의 ‘과학적 모험’을 무사히 마친 뒤, 한층 넓어진 시야와 뜨거운 열정을 품고 복귀하겠습니다. 현장에서 마주할 우리 환자들과 동료들에게 이곳에서의 경험이 실질적인 기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남은 시간 동안 더욱 연구에 매진하겠습니다.
Jonathan Li 실험실 동료들과 함께한 랩 파티
강창경 서울대학교병원 감염내과 교수
HIV/AIDS, 바이러스 질환, 원인 불명 열성 질환 등을 전문으로 하는 의학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후 진료와 연구에 매진해 왔다. 특히 코로나19 중증 환자의 면역학적 특성과 유전적 위험 인자를 규명하는 국제 공동 연구에 참여하며 감염질환 분야의 학술적 위상을 높여왔다. 질환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진료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