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변화가 한꺼번에 몰아치는 시기, 노년
정신건강의학에서 연령에 따라 세부 분야가 명확히 나뉘는 경우는 소아청소년과 노인 정신 분야 정도다. 그만큼 노년기는 인간의 생애 주기에서 엄청난 변화와 적응을 요구하는 독특하고 고유한 시기이다. 박지은 교수가 이 복잡한 노년기 정신건강을 자신의 평생 전문 분야로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년기 정신건강 문제는 단순히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도, ‘마음이 약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에요. 뇌를 비롯한 신체 기능의 저하, 만성 질환, 은퇴와 사별, 급격한 사회적 관계의 축소까지 모든 스트레스 요인이 한꺼번에 들이닥치거든요. 사회적, 정서적, 신체적 인과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이 복잡함을 함께 풀어가는 과정이 의사로서 굉장히 매력적이고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특히 우울증과 인지장애는 노년기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문제이기에 자연스럽게 진료와 연구를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전문의를 취득하고 14년 동안 노인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박 교수가 체감한 가장 큰 변화는 ‘노인 세대의 독립성’이다. 과거에는 자녀들의 손을 잡고 병원을 찾는 어르신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부부끼리 혹은 혼자서 찾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부부 중심의 독립적인 삶은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돌봄과 지지 체계가 그만큼 약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건강을 잃거나 배우자와 사별하게 되었을 때 이전 세대보다 더 큰 취약함과 상실감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실제로 진료실에서 어르신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두려움은 ‘독립성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다.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짐이 되어 의존해야 하는 상태 자체를 견디기 힘들어하세요. 요즘 어르신들은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만큼 독립성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불안과 무력감도 훨씬 깊습니다.”


상실은 서서히 찾아와 삶의 모양을 바꾼다
노년기의 상실감과 고립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다. 신체 기능들이 약해지면서 아주 익숙했던 일상부터 서서히 어려워진다. 특히 친구나 배우자와의 사별을 겪으면 큰 고립감과 두려움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 은퇴 등으로 인한 사회적 역할의 변화도 큰 영향을 미친다.
박지은 교수는 은퇴 후 취미 생활을 하며 아내와 평온한 노년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던 한 70대 남성 환자를 떠올렸다. 완벽해 보였던 그의 노후는 아내가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증상이 빠르게 진행되며 일상 전반에 남편의 도움이 필요해졌고, 때로는 폭언을 하는 증상까지 나타났다.
“완벽하게 준비된 노년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화 속에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죠. 보호자였던 그 어르신도 상담을 이어가며 예전처럼 먼 미래의 행복을 꿈꾸기보다 하루하루 배우자와 평온하게 지내는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셨습니다.” 결국 노년기는 ‘변화하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하는가’ 의 질문을 마주하는 시기이자 동시에 인간적인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과정을 겪고 계시기에 저는 그분들의 시간과 삶에 늘 깊은 존경심을 느낍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라는 말 한마디의 무게
치매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진료실을 찾을 때 박지은 교수에게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철칙이 하나 있다. 아무리 환자의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자기결정 능력이 떨어져도 반드시 ‘환자 본인’ 에게 먼저 질문을 건네는 것이다. 사실 치매 환자의 진료는 보호자의 진술 중심으로 흐르기 쉽다. 실제 증상이나 일상생활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보고할 수 있는 사람이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답답한 마음에 먼저 말을 꺼내려 할 때도 박 교수는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보호자분께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씀드린 뒤 어르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먼저 여쭤봅니다. ‘어르신,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고요. 어렵게 걸음하셨는데 한 마디도 못 하고 가시면 대진(對診)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가 이 사소해 보이는 원칙에 집착하는 이유는 노년이 될수록 ‘누군가 나의 안부와 삶을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경험’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질문의 방식 역시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잘 못 지내셨어도 반사적으로 ‘응, 잘 지냈어’ 하고 입을 닫아버리세요. 하지만 ‘어떻게 지내셨어요?’라고 열린 질문을 하면 의외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최근에 뭐가 가장 힘들었는지, 몸의 어디가 불편했는지, 가슴 속 고민들을 툭 터놓으시죠. 그 투박한 대답 한마디 속에 어르신의 진짜 삶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나이가 들며 조금씩
의존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정상적인
삶의 한 단계입니다.”

치매 예방의 열쇠는 ‘동기부여’ 그리고 ‘맞춤형 활동’
박지은 교수의 주요 연구 분야 중 하나는 ‘치매 예방’이다. 그는 인지 훈련 앱이나 코칭 프로그램 등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해 왔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 스스로 ‘삶을 바꾸고 싶다’고 느끼는 ‘동기부여’라고 말한다.
“내가 점점 쇠퇴할 거니까 대충 살겠다는 무기력한 마음을 가지신 분들은 아무리 좋은 것을 권해드려도 부담으로 받아들일 뿐 따라오지 못하십니다. 이분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동기를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동기부여만큼 중요한 또 다른 원칙은 ‘개인 맞춤형 제안’이다. 사람마다 할 수 있는 활동과 관심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평생 걷기만 해오신 분에게 갑자기 헬스장에 다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걸어가다가 운동기구가 보이면 거기서 10분 정도 근력 운동을 해볼까요?’처럼 본인의 일상적인 수준에 맞춘 구체적인 제안을 합니다.”
마음 건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많이 움직이고 혼자 지내지 않는 것이다. 노년에는 아프다는 이유로 한 달만 누워 있어도 근육량이 확 빠지는데, 힘이 없어서 못 나가니 더 힘이 빠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어디 안 나가본 사람한테 갑자기 노인정에 가라고 권유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현재 가진 관계망 안에서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전화 연락을 자주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을 합니다. 세상과 연결되는 끈이 계속 있어야 하고, 움직여야 하거든요.”
“의존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박지은 교수는 노년기 정신건강 문제를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치매는 환자 개인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돌봄 부담과 간접 비용이 매우 큰 질환이기에 지역사회와 국가적 안전망이 필수적이다.
“어르신들은 ‘나이가 드니까 당연히 우울하지’라며 방치하고 가족들도 치료가 필요한 질환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것도 이와 관련이 깊습니다. 현재 세대 노인들이 전쟁을 겪고 자식들에게 모든 걸 내어주느라 경제적, 정서적으로 준비가 안 된 탓이 크죠. 다행히 노년기 우울증 치료는 예후가 좋은 편이에요. 특히 치료를 받으시면 신체 건강까지 같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박 교수는 노년을 맞이한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의존 자체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인간은 원래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며 산다는 건 환상에 가깝죠. 나이가 들며 조금씩 의존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실패나 상실로 받아들이며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년기의 행복감은 젊은 시절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즐거운 경험을 할 때 오는 행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삶을 지나오면서 생기는 인간적인 변화, 성숙, 깨달음과 지혜에서 오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다. 그래서 긴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얼굴에는 결국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