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정희

사진. 박순재(Studio Cube)

정혜윤 PD는 사람의 말을 오래 듣는 사람이다. 방송을 만들고, 인터뷰를 하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옮겨왔다. 그는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신이 나는지, 어떤 말 앞에서 목소리가 달라지는지 유심히 본다.
“누구를 책에 담으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진짜 많이 생각해요. 그 사람의 가장 좋은 점을 최선의 방식으로 들려주고 싶거든요.”
그에게 인터뷰는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시간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 오래 머물던 귀한 이야기들을 함께 꺼내보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만나면 “이걸 더 알려야지”, “이걸 나눠야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그는 나이 듦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그동안 지내온 시간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시 보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죠.”

나를 사랑한 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멋지게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혜윤 PD는 이 질문에 ‘사랑의 방향’을 먼저 이야기했다. 젊은 날에는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많은 마음을 쓴다. 나를 지키고, 나를 설명하고, 나를 사랑하려 애쓰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그 마음이 세상으로 향한다.

처음에 난 주로 나 자신을 사랑했던 것 같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으니 그럴만도 했지
(…)
먼저 자신을 사랑하기를 그다음엔 그걸 잊어
그다음엔 세상을 사랑하는거지 - 메리 올리버의 시 <우선 달콤한 풀>

정혜윤 PD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랑이 줄어드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많아진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사랑이 커지고 깊어지는 사람들의 말에는 무게가 다르다. “밥 먹었니?”라는 한마디에도 엄청난 감정적 무게가 있고, “별일 없니?”라는 말에도 깊은 마음이 담겨 있다.
“사랑은 의외로 사소한 것 같아요. 밥을 챙겨 먹었는지 묻고, 안부를 확인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습관, 이 모든 것이 사랑인 것 같거든요. 나이 든 사람들 중에는 ‘감사하는 방법’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어요. 수박에 감사하는 방법, 커피에 감사하는 방법, 아름다운 여름날에 감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을 보면 참 배우고 싶어져요. 세상을 더 많이 고마워할 줄 알고, 작은 것 앞에서 마음이 무뎌지지 않는 것. 자신에게만 향하던 마음을 천천히 밖으로 보내는 것. 좋은 나이 듦이란 바로 이런 모습들 아닐까요?”

세상을 사랑으로 보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깃든 온갖 병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한다.
그리고 새와 나무가 속삭인다.
“친구여!” 하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 지향하는 바다. - 매튜 C. 할트먼의
<배고프고 아름다운 동물들> 속 문장

상실의 슬픔 뒤에 다시 보이는 것들

물론 나이 듦에는 상실도 따른다. 대부분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자식의 시간은 갑자기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빨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이 찾아올 때 우리는 쓸쓸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부모를 떠나보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산다.
“어느 봄날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무심코 서게 된 은행나무 밑에서도 그런 순간은 찾아와요. 가만히 바라본 그 나무가 생전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던 나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마음은 왈칵 무너져 내리죠. 이처럼 슬픔은 예고하고 오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오래 잊고 있던 장면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질 때 갑자기 찾아오곤 합니다.”

동심이란 것이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동백꽃을 만나면
동백꽃의 고운 모습에 정신을 파는 마음이다

또한 옹심, 곧 할아버지 마음이란 것이 있다
그것 또한 동백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깊이
정신을 파는 마음이다 - 야마오 산세이 시 <어린아이 마음 할아버지 마음>

정혜윤 PD가 말하는 나이 듦은 어둠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전에는 별것 아니라고 지나친 것들이 어느 순간 완전히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야마오 산세이의 ‘어린아이 마음 할아버지 마음’이란 시가 나이 듦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수록 전에는 별것 아니라고 지나친 꽃, 나무, 안부,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같은 것들이 어느 순간 완전히 달리 보이잖아요. 전에는 이게 그렇게 좋은지 몰랐는데 시간이 흐른 뒤 마치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게 다시 알아보고 깊게 감탄하게 되는 거죠.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대로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순간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조금 더 깊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명씨의 삶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

정혜윤 PD가 추천한 책들도 이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작은 미덕들」. 그는 이 책들에서 평범한 삶이 가진 슬픔과 아름다움을 읽었다. 특히 죽음 뒤에 깨끗이 잊힐 무명씨 같지만 그 평범한 삶 안에도 절망과 희열, 헌신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스토너」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모두의 이야기 속에는 슬픔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재료로 삶을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책 「슬픈 세상의 기쁜 말」도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고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다. 자식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두렵고, 부모에게 갑자기 전화가 올까 무섭고, 내 몸이 아플까 걱정된다. 그래도 우리는 나와 타인을 기쁘게 할 말을찾을 수 있다. “나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말처럼,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다정한 말을 부지런히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최근 정혜윤 PD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으로 남았던 기쁜 말이 있었다. 그는 최근 알게 된 김치헌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외과 교수와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김치헌 교수님은 참 인상적이었어요. 환자를 기계적으로 대하지 않더라고요. 특히 첫 질문이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였는데, 직업을 묻고 삶의 상황을 찬찬히 들으면서 저에게 꼭 맞는 태도를 알려주셨죠. 치료를 마친 뒤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던 날에는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짧지만 강렬한 당부를 건네셨어요. ‘몸을 소중히 여겨주세요’라고요.”
그 말이 일반적인 주의사항처럼 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환자들의 슬픔을 지켜봐 온 의사가 건네는 묵직한 진심처럼 들렸다. 그 순간 자신의 몸이 온 힘을 다해 돌봐야 할 ‘우주’처럼 느껴졌다. 함부로 넘겨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삶이라는 것을 일깨워준 그 한마디 때문에라도 그는 어디선가 꼭 김치헌 교수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다. 내가 살면서 느꼈던 감탄과 감사를 다시 되돌려주는 것, 그것이 정혜윤 PD가 글을 쓰고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큰 힘이다.

삶의 기쁨을 기억하는 일, 메멘토 비타(Memento Vita)

정혜윤 PD는 ‘삶을 기억하라(메멘토 비타)’라는 말이 지닌 힘을 강조했다.
“다 지나간 일 같아도 우리가 겪은 소중한 순간들, 좋았던 기쁨의 기억들을 끊임없이 꺼내어 기억해야 해요. 그 다정한 기억들이 결국 우리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고 우리를 웃게 만들거든요. 최후의 한 방울까지 삶의 기쁨을 짜내어 기억하는 일, 그것이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합니다.”
그가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듦은 젊음을 오래 붙드는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친 일상을 다시 보고, 누군가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으며, 나와 타인을 기쁘게 할 말을 부지런히 찾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잃는 것도 많아진다. 하지만 그만큼 자주 고마워하고 감탄하는 순간도 많아진다. 내게도 좋았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 나를 살게 한 다정한 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쉽게 늙지 않는다.
그는 요즘 시간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는 책 제목은 ‘만약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이다.
“시간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눈부신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게 바로 ‘우리의 시간’이니까요.”
정혜윤 PD의 이야기는 결국 한 문장으로 남는다. “삶의 기쁨을 기억하라.” 이 말이 나이 듦 앞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문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