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에서 넓힌 아시아인 유방암 연구의 지평
약 11개월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첫 외래 진료. 시작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진료 대기 명단은 30분 지연을 알리는 빨간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익숙지 않은 새 시스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미국 연수 기간 동안 제 삶의 페이스가 현저히 느려졌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느림'은 1년 전 제가 왜 잠깐의 멈춤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정리하고 싶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 주었습니다.
저는 2024년 9월부터 약 11개월간 University of California Irvine Health (UC Irvine Chao Family Comprehensive Cancer Center) 외과에서 장기연수를 수행했습니다. 암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보다 유명한 여러 후보지 중 이곳을 택한 것은 젊은 유방암 환자를 연구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내에서도 아시아인의 비율이 높다는 점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와 함께 아시안 유방암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진 Dr. Holly Minsun Yong과 지속적인 협력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매력적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 연구 환경에서 최신 방법론을 배우고 본인의 전문 분야의 핵심 커뮤니티에 들어가기 위해 장기연수를 다녀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의학의 수준과 국제 학회에서의 역할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일부 분야에서는 우리가 오히려 선도적 위치에 서 있다고 평가받고 있기때문에 전통적인 ‘연수’의 역할이 줄어든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종 검증 연구,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 상호 보완적 연구 인프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장기연수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스템의 공백을 채우고 남을 ‘환자분들의 신뢰’
이번 연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연구 역량이 반드시 병원의 ‘명성’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특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지 않는 기관이라 하더라도 연구를 위한 재정적·행정적 지원과 전담 인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서 연구자의 의지와 아이디어만 있다면 여러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지원 시스템과 연구 환경은 의학자로서 분명 부러운 대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울대학교병원에 대한 자부심도 커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시스템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동력, 바로 ‘환자분들의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분들께서 연구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시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에 세계적 수준의 임상·중개 연구 성과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습니다. 연구중심병원으로서 우리가 내는 성과들은 결국 우리 병원을 믿고 기꺼이 연구에 참여해주시는 환자분들 덕분이라는 것을 먼 타지에서 다시금 깊이 새겼습니다.
삶의 균형 끝에서 되찾은 단단한 초심
개인적으로 삶의 균형을 재정립한 것도 큰 수확입니다. 진료와 연구 일정을 소화하느라 충분히 함께하지 못했던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요. 비록 밤이면 한국의 동료들과 온라인 미팅을 하느라 “한국에 있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듣기도 했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두 딸의 도시락을 싸는 ‘K-아빠’로 살기도 했지만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비로소 ‘아빠’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향후 교육과 연구, 진료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마음의 배터리를 채워준 완벽한 ‘리셋(Reset)’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단단해진 마음으로,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신 환자분들 곁으로 돌아갑니다. 멈춤의 끝에서 다시 마주한 의사로서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더 뜨겁게 정진하겠습니다.
이한별 서울대학교병원 유방내분비외과 교수
유방암의 정밀 진단 및 환자 맞춤형 수술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학자. 차세대염기서열분석(NGS) 기반의 ‘유방암 예후예측 검사’를 개발해 불필요한 항암치료를 줄이고 최적의 치료 전략을 제시하는 중개연구에 주력해왔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21년 보건의료 R&D 우수성과’에 선정되었으며, 다수의 국제 학술지 논문 발표를 통해 유방암 정밀의료 분야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현재는 유전체 분석 기반의 개인 맞춤형 치료 고도화에 집중하며 환자들에게 완치의 확신과 희망을 주는 환자 중심 의료 실천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