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직한네발짐승
대성당을 뜻하는 카테드랄(cathedral)은 라틴어 카테드라(cáthědra)에서 나온 말이다. 의자, 그중에서도 주교가 앉는 의자를 카테드라라고 한다. 주교의 의자가 있는 곳이 바로 대성당이다. 우리말에서 대성당이 하나의 집으로, 물리적인 건축공간을 가리키는 것과는 달리, 주교가 앉아서 미사를 집전하는 의자가 대성당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회의를 주재하는 대표자를 가리키는 의장(chairman)이라는 단어에도 역시 의자가 들어 있다. 체어맨은 나머지 참석자들이 서 있거나 벤치에 앉아 있을 때 자신의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왕궁의 가장 깊고 높은 곳에는 왕의 의자가 있고, 그 앞에서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춘다. 의자가 교회나 국가 권력을 상징하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의자에는 여전히 권위와 위계질서를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본성이 남아있다.
그러나 의자가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의자에 앉는 사람의 권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 누가 그 위에 앉든 의자는 낮은 곳에 웅크린 채 주인의 몸무게를 떠받치는 노역을 수행하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유려한 디자인과 화려한 황금장식으로 꾸며져 있어도 의자는 의자일 뿐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종속되는 도구로서 의자는 자신의 운명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Zbigniew Bolesław Ryszard Herber, 1924.10.29 ~ 1998.07.28)는 ‘의자는 돌처럼 인내심 있고, 동그라미처럼 단순한, 충직한 네발짐승’이라고 썼다. 서양 고전 가구에서 의자 다리에 동물의 발 모양을 조각해 넣었던 데도 아마 비슷한 상상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의자는 주인을 수행하는 과묵한 집사 같은 존재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 네발짐승과 함께 지낸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딱딱한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법부터 배운다. 요즘은 좀 달라진 모양이지만, 나무로 만든 무겁고 투박한 학교 의자는 푹신한 소파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물건이다. 그것들은 대개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모습으로 이곳이 놀이터가 아니라 엄격한 훈육의 장소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의자는 자신에게 지정된 자리에 꼿꼿이 앉아서 선생님을 주목하는 아이들의 몸에 직접 작용하여 자세를 정해주는 교정장치가 된다. 의자에 앉은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올 때까지 의자처럼 인내하고 침묵하는 법을 배운다. 긴 수업시간과 짧은 쉬는 시간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동안 아이들의 몸에는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에게 부과되는 무게를 조용히 견디는 의자의 덕목이 새겨진다. 우리 사회는 의자에 길들여지고 학교가 요구하는 규율을 내면화하는 아이들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재가 되고,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은 낙오자가 된다고 가르친다. 의자가 요구하는 규율에 얼마만큼 잘 적응하고 집중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앉게 되는 의자의 종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안락의자에 앉게 될 사람이 있고, 자신만의 의자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전형적인 경쟁사회 논리의 한복판에 의자가 있다.
의자는 눕는 것과 일어서 있는 것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인간이 찾아낸 새로운 자세를 보조하는 도구이다. 잠을 자려면 누워야 하고 움직이려면 일어서서 걸어야 하는데, 그 둘의 중간지대에 ‘앉기’가 있다. 누워 있기와 걷기 사이에서 앉아 있기라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 도구를 만드는 인간(호모 파베르)이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인간의 사유는 생존을 위해 쫓고 쫓기는 이동을 잠시 멈췄을 때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은 앉아 있는 동안 자신이 처해있는 적대적이고 긴박한 현실을 벗어나 지난날을 기억하고 다가올 내일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일상의 흐름을 벗어날 시간이 잠시도 주어지지 않았다면, 과연 인간이 자신의 시야를 지평선 너머로 확장하고 지금 이 순간을 넘어 영원을 생각하는 도약에 이를 수 있었을까. 관찰하고 사유하고 소통하는 인간에 가장 가까운 모습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인간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좌식 생활을 하는 여러 부족과 문화권이 있으니, 의자가 없었으면 인간 문명이 불가능했으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의자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몸에 맞춰 고안한 최초의 도구이며, 이후에 나온 모든 도구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 위에 걸터앉아서 자신의 몸무게를 두 다리가 아닌 나무토막이 지탱하도록 떠맡긴 채,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에너지를 다른 일에 사용할 수 있었다. 직립보행이 두 손을 걷기로부터 해방시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가능하게 했다면, 의자에 앉는 행위는 걷고 달리고 서 있는 동안 온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와 발을 해방시켜 생각하는 인간을 만들었다. 의자라는 도구를 통해 몸이라는 조건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한 인간은 이어서 나무토막이 아닌 다른 것들, 말과 늑대 같은 야생동물을 길들여 순종적인 노예로 만들었고, 결국 다른 인간을 자신을 위한 의자로 만들어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AI는 이러한 도구의 역사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AI 로봇은 동물의 다리 모양을 묘사한 조각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AI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급속히 사라질 거라는 우울한 전망 속에서 나는 AI가 노동자를 대체하는 세상이 오면 의자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본다. 가족도 연인도 없는 AI에게 의자가 필요할까. 앉아있을 의자가 없어지는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안규철 조각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후 7년 동안 『계간미술』에서 기자로 일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992년에 첫 개인전을 열면서 미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아홉 차례의 개인전과 여러 기획 전시회를 통해 일상적 사물과 공간 속에 내재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을 발표해왔다. 1997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를 역임했다. 서구 현대미술의 체험을 기록한 『그림 없는 미술관』, 사물에 관한 이야기 『그 남자의 가방』, 테이블에 관한 드로잉과 생각을 묶은 『43 tables』을 비롯해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첫 번째 이야기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두 번째 이야기 『사물의 뒷모습』, 사유와 평론을 묶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미술과 삶, 시대에 던지는 물음표 『안규철의 질문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등을 펴냈다. 역서로는 빌렘 플루서의 『몸짓들』, 히토 슈타이얼의 『진실의 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