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를 넘어 환자의 권리로환자 이름 없는 진료
2019년 3월 21일, 서울대학교병원 외래에서 환자 이름이 사라졌다. 대신 진료 접수를 하는 환자에게 당일 사용할 ‘A0000’ 과 같은 고유 번호를 부여했다. “김철수 님, 들어오세요” 대신 “A0000 님, 들어오세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번호는 채혈실부터 각종 검사실, 약국, 마지막 수납까지 모든 외래 공간에서 사용된다. 다만 진료실 안에서는 번호를 착각해 환자가 바뀌는 일이 없도록 이름을 불러 다시 확인한다. 개인 정보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사회 분위기에 발맞춰, 서울대학교병원이 앞장섰다. 환자들은 제도 도입 후 복잡한 외래 공간에서 이름이 불릴 때마다 발생하던 개인 정보 침해와 동명이인으로 인한 혼동이 사라져 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이전까지 병원에서 환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당연한 관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서울대학교병원은 환자의 불편에 귀 기울이며 개인 정보 보호는 환자의 권리라는 인식을 한발 앞서 실천했다.
돌봄을 함께 나누는 방법중증소아 재택의료 시범사업
하루 평균 14.4시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중증소아 환자의 주 양육자가 돌봄에 할애하는 시간이다. 여기에는 17.7회의 흡인치료, 6.8회의 자세 변경, 6.4회의 영양 공급이 포함된다. 이 모든 일을 하려면 주 양육자는 하루에 6시간도 채 못 잔다. 한 마디로 급성기 치료가 끝나고 퇴원한 뒤 중증소아 환자에 대한 돌봄은 전적으로 가정의 몫이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국가 및 병원 중심의 재택 돌봄 서비스가 지원되어왔지만, 국내에는 마땅한 시스템이 없었다. 2019년 1월 보건복지부가 도입한 ‘중증소아 재택의료 시범사업’이 최초 사례다. 사업 시작 당시부터 참여한 서울대학교병원은 의사와 간호사, 재활치료사로 구성된 재택의료팀을 직접 가정으로 보내 진료와 의료기기 사용법 교육 등을 진행하며 정규 시간 상시 전화·문자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1월부터 2025년 1월까지 358명이 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서울대학교병원의 이 시도는 점차 확산되어 2022년 세브란스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이, 2025년에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과 삼성서울병원이 참여하며 중증소아 필수의료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 잡았다.
독립형 단기의료돌봄센터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중증 소아청소년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한결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왜 이 아픔은 온전히 가족의 몫일까?” 국내에서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의료기기에 의지하는 소아청소년 환자가 4천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뒤에 숨은 가족의 숫자는 상상 이상이다. 이들 특히 주양육자에게는 시간의 자유가 없다. 국내 최초 독립형 단기의료돌봄센터인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이하 도토리하우스)는 이들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2023년 문을 열었다. 넥슨재단과 보건복지부, 서울대학교병원이 의기투합한 결과다. 도토리하우스에는 인공호흡기, 산소흡입 등 의료적 지원이 필요한 만 24세 이하 환자가 보호자 없이 최장 7박 8일, 연간 30일까지 머물 수 있다. 서울대학교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간호사가 24시간 상주하며, 음악치료 등 정서적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개소 1년간 226명이 도토리하우스에 머문 덕분에 보호자들은 미뤄뒀던 건강검진을 받고, 다른 자녀와 여행을 떠나고, 새 생명의 탄생을 맞이했다. 간병을 개인의 문제로 방치하는 대신, 병원이 돌봄 시스템 자체를 만든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