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과 미안함 사이

돌봄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떤 장면을 떠올릴까. 주로 30대 후반, 40대 초반인 지인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비슷하다. ‘부담’, ‘독박 돌봄’, ‘무서움’, ‘힘듦’. 부모님이 하나둘 중병을 얻기 시작하고 병원 동행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 세대에게 돌봄은 책무이자 고통에 가깝다.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미안함’이다. 몇 년 전부터 부모님의 병원 예약을 맡고 진료 내용을 정리해 다시 설명하고 다음 일정을 챙기라고 당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면서도 “같이 설명 들었는데 왜 모르시냐”, “그렇게 미루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러시냐” 같은 말을 쏟아낸다. 그러고 나면 늘 후회가 남는다. 어릴 적 자랑이던 부모님은 어느새 작아졌고 대형 병원에 가는 날이면 아침부터 긴장한다. 진료실에서는 부모님의 말씀을 대신 정리해 전하고 때로는 의사선생님께 ‘꾸중’을 부탁하기도 한다. 그래서 돌봄은 손이 많이 가고, 지치고, 부채의식이 달라붙는 일이다. 객관적인 정의가 궁금해서 AI에게 ‘돌봄이 뭐냐’라고 물었더니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37년 차 동네의원이 남긴 질문

동시에 머릿속에는 자꾸 ‘우리는 어떻게 곁에 머물 수 있을까’라는 문장이 맴돈다. 돌아보면 내가 매일 쓰는 기사들도 결국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시도였는지 모른다. 지난 1~2년간 이어진 의정 갈등 속에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더 나은 의료와 돌봄을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외면받는 필수의료 수가를 어떻게 높일지, 모두가 3차 병원으로 쏠리지 않게 동네의원에서 보살핌을 받으려면 무엇을 바꿔야 할지 같은 문제를 붙들고 취재했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장면 몇 개가 오래 남았다.지난 8월, 37년간의 진료를 마치고 문을 닫은 서울 성동구 ‘성수의원’의 마지막 일주일을 취재했다. 환자들에게 이 병원의 진료가 무엇이 달랐는지 물었을 때 많은 이들이 “질문이 달랐다”라고 답했다. 한 환자는 “대학생 때부터 이 병원에 다녔는데 올 때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부터 물으셨다”라고 말했다. 아픔이 근무 환경 변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피기 위한 질문이었다. 장애 아이를 돌보는 엄마에게는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잠은 잘 주무세요?”라고 꼭 안부를 건넸다. 그런 질문을 받다 울음을 터뜨리는 환자에게 의사는 무심한 듯 티슈를 내밀었다.나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과장된 위로나 극적인 관심이 아니어도 의료진이 던진 차분한 말 한 마디가 오래 버티게 해준 순간들이다. 가까운 가족이 위암 수술을 앞두고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 여러 주의사항을 설명하던 의사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근데 또, 우리 위는 생각보다 적응력이 강합니다.”
가족이 걱정될 때면 나는 이 말을 붙잡고 여러 번 곱씹었다.

더 나은 돌봄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의료개혁’ 같은 큰 단어를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은 그런 말로는 잡히지 않는 작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의료개혁보다 중요한 순간들

지난해 11월에는 강원 평창군 보건의료원을 취재했다. 인근 보건지소에서 공보의가 진료를 보러 오는 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보건진료소에 지역 어르신들이 모여든다. 의료장비가 많지 않은 진료소에서 할 수 있는 진료는 제한적이고,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한 질환은 읍내 병원에 나가서 봐야 한다.그럼에도 진료실을 나서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음식만 먹으면 설사를 한 지 오래돼 괴롭다”라고 호소하던 어르신에게 공보의는 “당뇨 합병증으로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을 수 있으니, 더부룩하지 않게 천천히 드시라”라고 설명했다. 어르신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놓은 듯했다. 진료를 마친 이들은 대기실에서 각자의 진료 경험을 한참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더 나은 돌봄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의료개혁’ 같은 큰 단어를 먼저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의 일상은 그런 말로는 잡히지 않는 작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진료실에서 건네는 차분한 설명 한 줄, 환자가 털어놓은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짧은 침묵 같은 것이 누군가에겐 치유를 향해 딛고 나아갈 힘이 된다. 어쩌면 좋은 돌봄은 거창한 제도보다 이런 순간들을 잊지 않고 미세한 움직임에 오래 귀 기울이는 일에서 시작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