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무게를 딛고 유럽 의료 혁신의 베이스캠프로
누구든 베를린에 가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역사의 무게를 느낀다. 그러나 이 도시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계대전의 상흔과 분단의 아픔을 겪은 곳이지만, 끊임없는 재건과 혁신을 통해 유럽의 문화·정치·기술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 위치한 샤리테 병원을 찾았을 때도 비슷한 인상을 받게 된다. 300여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고 있는 병원이기 때문이다.
먼저, 샤리테 병원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샤리테는 1710년, 당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동유럽에서 유행하던 흑사병에 대비하기 위해 설립한 병원이다. 병원의 이름은 이후 프로이센 제2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지시에 따라 ‘샤리테(Charité)’로 정해졌으며, 이는 프랑스어로 ‘자선’ 을 뜻한다. 샤리테 병원이 인도주의와 구제 활동을 운영 철학으로 삼고 있는 이유도 이 같은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샤리테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의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들을 배출하며 혁신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현대 병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돌프 비르호프(Rudolf Virchow), 결핵균을 발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 외에도 파울 에를리히(Paul Ehrlich)를 비롯한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이곳에서 연구하고 교육을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의 네 개 지역, 네 개의 의료 구역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으며, 매년 14만 명의 입원 환자와 70만 명의 외래 환자가 찾는 세계적인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25년 샤리테 병원–베를린 의과대학의 의료 연구기관은 뉴스위크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병원’ 순위에서 당당히 6위를 차지했다. 이번 평가는 전 세계 2,400여 개 병원을 대상으로 의학적 권고, 환자 만족도, 치료 품질, 위생 수준 등 핵심 의료 성과 지표를 종합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신뢰할 만하다.

다양한 연구와 도전을 통해 환자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
샤리테 병원이 독일을 넘어 전 세계 의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학사원(Medical School)’이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 핵심은 설립 초기부터 이어져 온 다학제 통합 진료와 교육·연구의 유기적 연계 시스템이다. 샤리테 병원은 다양한 전문 분야의 의료진이 협력해 환자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치료 계획을 수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시스템 덕분에 암, 심장 질환, 희귀질환 등 복합적이고 난치성 질환에 보다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샤리테 병원의 이런 강점은 특정 진료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샤리테는 정형외과, 신경외과, 종양 치료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데 중심에는 종합 암 센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진단부터 치료, 심리치료, 사회적 돌봄, 사후 관리까지 모든 단계를 아우르는 ‘전주기 연계 치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임상 및 과학 종양학의 전 영역을 병원 내에서 통합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모든 관련 진료과와 의료 인프라가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암 치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탁월한 통합 시스템은 2008년, 샤리테 암 센터가 독일 암 협회로부터 독일 최초의 인증 암 치료센터로 선정되며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샤리테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현재는 인공지능 도구인 ChatGPT를 활용해 암 환자 맞춤형 치료 옵션을 제시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며, AI 신약 개발 기업 Exscientia와의 협업을 통해 혈액암 환자를 위한 인공지능 기반 치료 선택 플랫폼도 개발하고 있다. 이런 시도들은 단순한 기술 적용을 넘어, 정밀의학의 미래에서 인공지능이 지닌 가능성과 역할을 탐색하는 선구적인 행보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샤리테가 주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점 연구 프로젝트는 ‘중환자실 완화 치료 강화(EPIC)’다. 샤리테–베를린 의과대학이 이끄는 이 국제 컨소시엄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로부터 약 630만 유로의 연구비를 확보해 5년간 운영되며, 중환자의 남은 수명과 삶의 질을 유지·향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재는 전문 완화의료가 필요한 환자를 조기에 식별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개발하고 있고, 유럽 5개국 7개 완화의학 임상센터와 23개 다학제 중환자실에서 약 2,000명의 환자와 가족이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목표는 생존율 향상이라는 기존의 지표를 넘어서, 중환자실 체류 기간을 단축함으로써 삶의 마지막 시기를 보다 인간적으로 만들고, 환자와 가족에게 실질적인 위로와 존엄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이는 생의 끝자락에서 진정한 돌봄이 무엇인지를 묻는 중요한 탐구이기도 하다.
유럽의 보건 위기 대응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최근까지 유럽대학병원연합(EUHA)의 회장국으로 활동하면서, 위기 상황에 유럽 내 중환자실 간호 인력을 신속하게 연계·배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EUCARE’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는 간호 분야 최초의 범유럽 협력 모델로, 향후 유럽 각국의 의료 시스템이 보다 탄력적이고 환자 중심적으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디지털 전환에 대한 샤리테의 철학 또한 분명하다. 사람의 개입이 반드시 요구되지 않는 업무에는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현재 병원 운영 전반에 인공지능 기반 의료기술을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단순한 기술 수용을 넘어, 의료의 미래를 선도하려는 샤리테의 의지와 실용적 비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설립 연도 1710 년
- 위치 독일 베를린 중심, Campus Mitte를 포함한 총 4개 캠퍼스 운영
-
병상 수
3,000
명 4개 캠퍼스 통합 기준, 독일 최대 규모
-
의료 인력 20,000 명
의사 약 5,000명 포함 -
중증 및 희귀 질환
치료 중심 기관 독일 내 중증 환자 전원 중심 기관으로 희귀 질환, 고난도 수술, 중증 종양 치료에 특화 -
환자 맞춤형 정밀의료
(Personalized Medicine)
선도 기관 BIH(Berlin Institute of Health)를 중심으로유전체 분석, 분자 진단 기반의 정밀의료 체계 구축
- 글로벌 연구 허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 백신·항바이러스제·중환자 치료 관련 유럽 내 핵심 연구 및 임상시험 병원 역할
샤리테가 만들어낸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도,
아닌 ‘한 사람을 향한 집중’에 있다.

의료 및 연구 기관의 리더십
샤리테 병원의 노력은 단순한 진단과 치료에 그치지 않는다. 통합 진료와 연구, 교육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체계 속에서, 최신 의학 지식은 논문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임상 현장으로 옮겨간다. 환자의 고통은 빠르게 이해되고, 그에 맞는 정밀한 해법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글로벌 의료 네트워크의 일원으로서 샤리테는 원격 진료, 인공지능, 디지털 헬스케어의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를 환자 맞춤형 치료라는 본질적 목표를 위해 전략적으로 통합해내고 있다. 결국, 샤리테가 만들어낸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도, 전통도 아닌 ‘한 사람을 향한 집중’에 있다. 환자의 삶과 질병, 그 복잡한 층위를 온전히 이해하고 응답하는 이 섬세한 접근은 오늘날의 병원이 미래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도 하다.서울대학교병원은 이미 그 길을 걸어왔다. 의료의 최전선에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맞춤 치료’ 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계하고 책임지는 일. 서울대학교병원이 단순한 국가중앙병원이 아닌 국민들에게 가장 신뢰와 사랑 받는 병원으로 우뚝 서 온 것도 그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