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진단, 그리고 선택의 순간
유럽에서 여행업을 하며 바쁘게 사는 동안도, 윤효동 후원인은 건강에는 언제나 자신이 넘쳤다. 2015년 귀국 후 서울대학교병원 건강검진센터를 찾은 것도 그저 예방 차원이었다. 그런데 2024년 정기 검진에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됐다. 췌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니 전문의를 만나보라는 권유였다. 이틀 후, 병원으로 달려간 윤효동 후원인은 소화기내과 조인래 교수와 마주 앉았다. “섣불리 확정하기는 힘들지만 저는 암이라고 생각합니다. CT 촬영, 조직검사 등을 통해 정확히 확인한 후 다시 뵙겠습니다.”
침착한 듯 단호한 조인래 교수의 진단을 듣고 돌아서는 길, 윤효동 후원인은 그간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예년에 비해 건강검진을 두세 달 늦게 받은 사실이나 간헐적으로 찾아오던 등 통증을 가벼이 넘긴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암 판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으니 가벼운 해프닝으로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보름 후, 모든 검사를 끝내고 진료실에 들어선 윤효동 후원인을 기다린 것은 ‘췌장암 판정’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습니다. 60년 이상 살면서 건강검진 외 다른 목적으로 병원을 찾았던 적이 없었으니 당황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겠죠. 교수님이 바쁘실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걸 다 들어주시더니 딱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20년은 살려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는 말이었죠.” 그 말 한 마디가 결정적이었다. 윤효동 후원인은 최종 진단을 받기 전까지 고려했던 수술적 치료, 중입자 치료 등을 모두 지웠다. 종양이 2cm에 불과하고 전이된 곳이 없어 보인다는 것도 희망적이었다. 무엇보다 주치의의 강력한 확신이 ‘살 수 있다’는 의지를 북돋웠다.

“제가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교수님께서 적극 설득하셨어요. 속으로 ‘의사가 왜 환자한테 이렇게까지 사정을 하나’ 싶었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끝까지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10차에 걸친 항암치료, 그 곁을 지킨 사람들
여름의 초입, PET-CT 촬영과 함께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됐다. 조인래 교수는 “전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정확한 게 좋으니까요”라고 말했지만, 결과가 나오기까지 윤효동 후원인은 엄청난 불안에 시달렸다. PET-CT 결과에서 전이를 확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도 조인래 교수의 예상이 적중해 윤효동 후원인은 곧바로 항암치료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암치료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치료가 거듭될수록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입맛을 잃어 식사조차 하기 힘든 날도 많았다. 특히 2차 항암 직후에는 속이 울렁거려서 병원에 들어서기조차 꺼려졌다. 결국 윤효동 후원인은 치료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도저히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했더니 교수님이 CT를 찍어보자고 하시더군요. 며칠 후 CT 결과를 보니 암세포가 정말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힘든 과정을 다시 반복할 엄두가 안 나서 망설였는데 교수님은 포기를 안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깨끗한 암세포를 본 적이 없다고, 가능성이 있는데 왜 멈추냐며 한 시간 가까이 설득하셨던 것 같아요. 그 마음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듭되는 항암치료에 지쳐 중단을 생각할 때마다 의료진은 때로는 데이터로, 때로는 설득과 사정으로 윤효동 후원인을 붙잡았다. 그렇게 10차까지 항암치료가 이어지는 동안 윤효동 후원인은 의료진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버텼다. 음식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도 죽기 살기로 식사를 해냈다.
“사실 처음 진료실에서 만났을 때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제 아들 또래로 보이기도 했고, 교수님에게는 저 같은 환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 저보다 절실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틀렸어요. 순간순간 저는 포기하려고 했지만 교수님은 물러서신 적이 없었어요. 마주 앉아만 있어도 저를 꼭 살리겠다는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다른 의사선생님을 많이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누군가를 돕는 건 늘 해왔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습니다.절망 속에서 붙잡아준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진께 마음을 다해 보답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후원이란 방식으로 표현된 것뿐입니다.”
의사의 마음, 환자의 마음
10차에 걸친 항암치료 후 수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윤효동 후원인은 그 길로 서울대학교병원 발전후원회 사무국을 찾았다. 기부를 통해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진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수술이 남아있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의료진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텐데, 제가 직접 드릴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그래서 암 치료를 위한 연구에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후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서, 교수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이름도 안 남기려고 했습니다. 제가 빛나는 게 아니라 이런 의사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윤효동 후원인은 조인래 교수를 포함한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진을 ‘진심을 다해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정확한 진단과 치밀한 치료로 암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뢰와 진심을 전해, 소생을 향한 환자의 의지까지 북돋는 사람이라는 최고의 찬사다. 이 과정에서는 서울대학교병원의 분위기도 큰 몫을 했다.
“좋은 병실에 묵었지만 인상 깊었던 건 쾌적한 공간만이 아니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을 비롯해 치료받는 내내 따뜻하게 대해준 구성원들과 교수님 덕분에 힘을 냈으니까요. 이곳에 계시는 분들이 더 편안하게 연구하며 더 많은 환자들을 살릴 수 있도록 힘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치료 도중 1억 원을 후원한 윤효동 후원인은 현재 수술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병원 의료진의 진심이 만들어낸 확신 덕분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