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에 나를 눕히기까지

시작은 시력교정수술이었다. 시력교정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강남의 안과에서 여러 가지 검진을 받다가 의사가 다른 병원에서 망막 관련 검사만 하나 더 해봤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눈의 문제가 아닐 수 있으니까 큰 병원에 가보라면서 집과 가까운 대학병원 안과 예약을 도와주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윗사람들과 회식까지 하고 안과 검진을 받으러 갔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몇 년 지나면 노안이 올 텐데 왜 굳이 시력교정수술을 하느냐는 조언을 한 교수는 “여기까지 왔으니” 한 가지 검사만 더 해보자고 했다. 방사능을 사용하는 검사라고 했다. 동의서를 쓰고 혈압을 재고 오라고 했다. 병원 복도의 혈압검사기에서 갑자기 200을 훨씬 웃도는 수치가 나왔고 간호사는 내과와 전화 통화를 하더니 지금 바로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그날은 철야 마감일이었다. 나는 죄송하지만 예약을 잡아 주시면 내일 아침에 바로 내과로 방문하겠다고 했다. 다시 내과와 통화한 간호사는 지금 귀가할 수 없다고, 바로 응급실로 가라고 다시 말했다. 내 발로 걸어서, 현기증이든 두통이든 아무 증상도 없이, 멀뚱멀뚱한 얼굴로 응급실에 갔다. 안과에서 보내서 응급실에 왔다는 설명은 아무래도 수상했던 모양인지, 나는 여러 차례 질문에 답해야 했다.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혈압을 확인받고 나서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멀쩡해 보이지만 위험할 수 있었다는 말

내가 느끼기에 나는 너무 멀쩡했다. 심장, 혈관 관련한 가족력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았지만 직장인 건강검진 때는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없었다. 회사 일도 일이었지만 회사 일을 마치고는 다른 업무들도 줄지어 있었다. 혈압강하제를 맞고 응급실에 누워있는 시간 자체가 너무 무료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의사들이 번갈아 와서 멀쩡한 나를 보고는 간호사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안과에서 보냈다고?” 혈압강하제를 맞고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기 전에 나는 이미 언제 퇴원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인턴 정도로 보이는 젊은 의사가 차트를 살핀 후 나에게 말했다. “지금 아무렇지 않은 것 같으시겠지만 위험할 수 있었어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나를 진정시켰다.
그때까지 나는 가족의 병간호는 적잖게 해봤지만 내 문제로 병원에 갈 일은 없었다. 그래서 보호자일 때와 환자일 때가 다르다는 걸 그때까지 몰랐다. 보호자일 때 환자를 보면 (비과학적인 인간 분류법이지만 민간에서는 신뢰도가 높은 MBTI 식으로 말해) 한없이 F처럼 보였다. 하소연은 많은데 제대로 된 정보를 걸러 듣고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자가 되어보니 나를 돕겠다는 사람들은 의료진을 포함해 다들 T처럼 굴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만 있고 내가 경험하는 불안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환자는 하소연만 할 리 없고 의사와 보호자는 지시만 할 리 없지만, 그렇게 느끼게 된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그렇다. 아프지 않았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이 오로지 병증과 고통에 대한 화제만을 두고 대화한다는 게 그렇다. 내가 응급실에서 만난 그 의사의 말에 수긍한 것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으시겠지만” 때문이었다. 주사제나 알약보다 효과는 확실히 없었을 아무것도 아닌 말이었지만 ‘이렇게 응급실에 누워야 하는 줄 알았으면 회사로 일단 돌아갈 걸’같은 한심한 생각은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 실려서 심장혈관병동의 중환자실로 가면서 주말에 잡힌 일정을 하나씩 취소하느라 전화를 걸다가 침대를 미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중환자실에서 전화를 할 수 있나요?” 간호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의식이 있는 상태로 가시는 분들이 거의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는 그만 입을 닫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곁에 머문다’는 말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듣기란 내가 타인임을 아는 일에서 출발한다.

타인을 받아들일 때, 듣는 일이 시작된다

‘환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의료진을 만난다는 건 모든 환자의 소망일 것이다. 의사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환자가 되어 의사를 만나기 전에는 환자의 기분 같은 걸 짐작으로 알기는 어렵다. 모른다고 생각해야 귀가 열리는데, 알겠다고 생각하니 끼워 맞추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답은 버리게 된다. ‘이해한다’, ‘알겠다’는 말보다 중요한 건,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듣기’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더 파더>라는 영화가 있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앤서니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우리는 그가 사는 런던 아파트가 변하기 시작하는 상황에 당황한다. 낯선 사람이 불쑥 나타나거나 홀연히 사라진다. 그는 가족들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앤서니의 딸 앤은 고집스러운 성격의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간호사가 그만두자, 새 간병인 후보의 면접을 본다. 이 정도 설명이면 앤서니가 앓는 병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츠하이머가 소재인 작품은 적지 않지만 <더 파더>의 소름 돋는 점은 이 영화가 알츠하이머 환자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담아낸다는 데 있다.
‘저 사람(환자)은 왜 저러지?’가 아니라 ‘내가 왜 이러지?’의 흔들림을 담아낸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있고 슬픔이 있다. <더 파더>를 본 관객 후기 중에는 ‘치매로 고생하신 아버지(어머니) 생각이 났다’라는 말이 많다.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인지능력에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당사자 입장에서 경험하고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해한다고 그 혼란이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엄연한 거리가 존재한다. 영화와 관객의 거리처럼.타인임을 받아들여야 들을 수 있게 된다. 곁에 머물기 위해서는 내 자리가 ‘곁’이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질문은 초진에서 오가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일지도 모른다. 자기 얘기를 찬찬히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존중받는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현대의 가장 귀한 자원은 시간과 관심이다. 진료실과 병실에서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