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AI의 평행 구조

역사적으로 의학은 인류의 건강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인 수단을 적극 수용하며 수많은 혁신을 이루어 왔다. 특히 현대 의학은 통계적 분석을 통해 체계적이고 상호검증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진단과 치료를 수행하는 ‘증거기반’ 실천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의학의 증거기반 실천이 최근의 AI(인공지능) 개발 및 활용 방식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AI의 놀라운 성취는 각 전문 분야에서 축적된 지식을 학습해 유용한 패턴을 추출하고, 이를 예측이나 생성에 활용한 결과다. 이는 의사들이 정리된 의학 지식에 근거해 환자를 진단하고 예후를 예측하며 치료법을 고민하는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분석 기술은 의학에 자연스럽게 접목될 수 있으며, 인류의 건강과 복지에 기여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기술이 도구 이상을 향할 때

이 지점에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기술이 단순한 도구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사용 전후를 비교해 보면, 인지 능력이나 사회적 관계 맺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기술은 특정한 의도 아래 만들어지지만, 특정 행동을 유도하고 새로운 인식 방식을 형성한다. 이를 기술의 행동유도성(Affordance)이라 하는데, 신경가소성 연구에 따르면 기술 사용은 두뇌에 중장기적인 변화를 불러온다고 알려져 있다.
변화의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인간과 기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생물학적 진화와 달리 인간-기술 공진화에 대해서는 평가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북극곰의 긴털과 사막 여우의 짧은 털은 각각의 환경에 적응한 결과이기에 어떤 형질이 더 ‘바람직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AI 기술에 대해서는 인간과 AI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이 바람직한지를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기술이 개발되도록 해야 한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아세모글루(Daron Acemoglu) 교수는 『권력과 진보』라는 저서에서 기술이 인류 복지에 기여하지 못한 사례의 공통점으로 소수의 독점적 활용을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바람직한 AI 개발을 위한 윤리적 거버넌스의 수립과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의학의 본질이 통합적 사고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있는 만큼
의사와 AI의 협업은 효율이 아닌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

겸손한 AI와 함께 진료한다는 것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AI가 대신할 날이 머지않았다’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그런데 실제 개발 현장은 인간과 협업하는 AI, 특히 AI 에이전트*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사용자의 말을 척척 이해하고 귀찮은 일을 대신해 주는 AI 에이전트가 사용자가 동의할 수 없는 행동이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의료 현장도 다르지 않다. AI는 의사의 진료, 처방, 치료 과정에 도움을 줄 만한 잠재력이 있다. 다만 의사의 통합적 실천을 ‘눈치 있게’ 보조하는 방식이어야지, 결정을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의사와 ‘겸손한’ AI의 생산적 협업을 위해서는 의료현장에서 사용되는 AI가 존중해야 할 가치에 대해 설계 초기부터 의사와 공학자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AI는 의학의 통합적 실천을 더욱 풍요롭게 확장할 수 있다.